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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추천 : 2 이름 : kconsultancy 작성일 : 2018-07-04 15:38:58 조회수 : 18
안녕하십니까? 까마인디아 유병연 사원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저번시간에 이어 간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30년 초, 간디는 노령을 이유로 하여 정치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젊은 정치 지도자 네루 등에게 그 자리를 맡긴 채 묵상과 헌신 등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정국은 구심점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간디는 다시 민족 운동의 선봉에 서서 나치의 잔학성에 항거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동시에 대규모의 반영 투쟁을 전개하면서 명분 없는 싸움의 종식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때, 의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투옥되었으며, 간디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옥중에서 간디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독립은 파키스탄과 인도를 갈라 놓는 반 쪽의 독립이었습니다. 인도 북부 지역에는 무슬림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힌두를 선봉하는 남부 인도와는 마찰이 잦았습니다. 끝내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의 인도가 분리 독립되었을 때, 그 독립식에 간디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의 융합을 외치면서 인도를 누볐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회색 분자로 낙인이 찍혀 어느 한쪽으로 부터도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간디는 굴하지 않고 유세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올리던 중 괴한의 저격을 받고 사망하였습니다. 힌두, 이슬람의 융합을 반대하는 과격 힌두 교도의 총탄이었습니다. 그 때 간디의 나이는 79세였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이념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 사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간디의 사상 중 근간을 이루는 것은 비폭력에 의한 무저항주의입니다. 아힘사(Ahimsa)라고 부르는 그의 비폭력주의는 많은 인도인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극한의 완벽성을 갖춘 자기 정화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폭력은 반드시 또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자치란 결국 각자의 도덕적 책임의 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는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기회와 편리를 줌으로써 자기 완성의 편의를 마련해 주는 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자치 이념이 도시나 혹은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관념의 유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것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또 큰 저택이 아니라 초가집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간디는 비록 자신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인도인들에게 남아있습니다. 인도는 간디를 통해 많은 것이 바뀌었고 간디는 인도현대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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